내 삶의 목표는 '어떻게'다. '무엇'과 다르다. 무엇은 미래의 어떤 지점에 점을 찍고, 그 사이 삶을 버티는 것으로 바꾼다. 예를 들면 삶의 목표가 부자다. 오늘의 고된 노동과 저축은 목표를 위한 밑거름이다. 오늘은 목적을 위한 과정이다. 결승점을 위해 무수한 날이 소모된다. 반면, '어떻게'는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한다.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늘을 오늘 자체로 축복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 모든 날이 소모되지 않고 존중받는다. 이 장황한 설명을 '어떻게'로 축약한다.



무엇과 어떻게의 차이는 다양한 유닛에서 구분 가능하다. 삶 전반에서 하루 단위로 줄어들 수도 있다. 예를 든다. 노동이 고되다. 고객이 성가시다. 운전이 거슬린다. 고통에서 회피하기 위해 퇴근 후에 있을 즐거운 시간(무엇)을 떠올린다. 신라면에 모짜렐라 치즈 투하하고, 에일 맥주 한 캔 까고, 먹고 마시고, 누워서 유튜브 보는 모습이 그려진다. 오늘의 의미는 그 순간에 있다. 내 정신은 시공을 초월해 그곳에 안착한다. 그때를 위해 지금을 희생한다. 몸은 지금에 머물고, 정신은 시간을 앞서 침대에 눕는다. 나의 노동과 커뮤니케이션과 운전은 제물이다. 나는 온전히 지금에 집중할 수 없다.



어떻게를 의식한다면 나의 모습과 하루의 만족도는 달라진다. 건강하게. 고됨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존중받아 마땅하다. 나의 휴식을 가치있게 만드는 시간이다. 동양철학의 음양과 같다. 모든 가치는 비교 대상을 요구한다. 기쁨의 토대는 슬픔이다. 쾌락의 토대는 불쾌다. 불쾌와 슬픔을 온전히 마주할수록 기쁨과 쾌락의 가치는 오른다. 지금에 방점을 찍으면 대조군이 사라진다. 청소기 돌리는 것은 누워서 유튜브 보는 것보다 즐겁지 않다. 비교하다 보면 청소기 돌리는 것은 불쾌가 된다. 어떻게의 삶은 청소기 돌리는 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는다. 먼지가 사라진다. 지저분한 공간이 깔끔하게 변한다. 깨끗하니 유쾌하다. 어느샌가 명상한다. 걱정의 부스러기를 빨아들인다. 노동을 즐길 수 있다.




동의어와 유사어가 있다. 어떻게의 삶은 카르페디엠으로 고쳐 쓸 수 있다. 지금을 즐기라는 의미다. 여기서 즐기다의 목적어는 모든 감정과 행동이다. 즐김은 온전한 받아들임을 뜻한다. 고통을 음미하고 곱씹고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욜로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욜로의 현재 쓰임에 한정한다) 욜로는 지금의 쾌락에 충실하라 명령한다. 조삼모사가 아니라 조칠모영이다. '어떻게'와 카르페디엠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기쁘지 않더라도 충실할 것을 명한다. 덮어놓고 즐기기와 다르다.



나의 어떻게는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지금을 즐기라고? 호텔 스위트룸 잡고, 스파하고, 카지노에서 전재산 탕진하자!가 아니다. 이것은 데스드라이브(죽음충동)다. 라캉이 주목한 자기파멸적 욕망 실현이다. 상징계의 규칙을 어기며 절대 닿을 수 없는 주이상스를 향해 나아간다. 완벽한 욕망실현은 죽음 말곤 없다. 데스드라이브의 끝은 죽음이다. '어떻게'는 내일의 나와 모레의 나를 존중한다. 충만함의 토대를 보전하려 한다. 카르페디엠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환경은 나보다 강하다. 최악의 빈곤과 질병은 지금을 즐길 힘을 앗아간다. 내일을 즐기고, 모레를 즐기기 위해 최소한의 환경이 필요하다. 의식주와 여가 시간을 전제한다. 그 뒤에 어떻게가 성립한다. 나는 주식을 사고 주택대출 원금이자를 매달 갚는다. 오늘에 충실하기 위한 포석이다.



앞서 내 삶의 목적을 설명했다. 이를 토대로 세계인의 전형적 목적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알아본다. 평행 우주에서 글방이 태어났다. 한국 사회에서 칭찬받아 마땅한, 성공의 전형을 따른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오리지널 글방과 다른 궤도로 향한다. 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공부한다. 저녁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독서실로 자리를 옮겨 1시까지 보충학습을 한다. 일요일에 테일즈 위버를 켜는 대신 문제지를 편다. 노래방에서 SG워너비를 부르는 대신 SKY워너비가 되어 목표를 되새긴다. 이혼가정에서 부모님의 경제적 서포트를 못 받는 만큼 더욱 노력할 필요를 느낀다. 고등학교 3년만 참으면 이 가난과 노동자 계층의 대물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 SKY를 목표로 혹독한 3년을 버틴다.



SKY에 입학한다. 학생증이 주는 만족감이 3년의 고됨을 온전히 보상하는가? 잘 모른다. 보상심리로 1년을 놀고 군대에 간다. 대학교 입학은 다음 목표를 위한 발판이었음을 깨닫는다. 대기업에 취업하지 못 하면 말짱 꽝이다. 지옥의 고등학교 3년 행군이 수포로 돌아간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고등학교 시절의 열정을 꺼내온다. 학자금은 나라에서 대출받아도 생활비는 내 몫이다. 과외 아르바이트,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틈틈이 공부한다. 학점이 낮으면 취직에 불이익이 생긴다. 졸린 눈을 뜨고 수업에 집중한다. 공모전 입상이력, 인턴십 경력, 각종 자격증도 필수다. 학교, 알바, 대외활동에 전력을 다한다. 대기업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보상을 받는다. 학자금도 갚고, 내 집 마련도 가능하다. 능력 있고, 예쁜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 대기업 취직이란 목적을 위해 3년을 버틴다.



서른 즈음 대기업에 입사한다. 사원증이 주는 만족감이 3년의 고됨을 온전히 보상하는가? 동년배 친구들보다 연봉의 앞자리 숫자가 높다. 보상받는 느낌이 든다. 사오정이란다. 사오십 대 정년이다. 15년~ 20년 동안 눈에 보이는 성취를 만들어야 한다. 그마저도 실적이 잘 나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 보상받는 느낌을 누리기 위해 회사 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월세가 저렴한 경기도에 집을 구한다. 출퇴근 시간 3시간에 야근을 더하니 개인 시간이 없다. 학자금을 갚고, 생활비 쓰고, 적금 든다. 주말에 친구들 만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이 자부심의 원천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 다짐한다.



서른 중반에 이르러 비슷한 환경의 여성을 만나 결혼한다. 각자가 모은 돈을 합쳐 서울에 작은 집을 마련한다. 아파트 원금과 이자를 갚고, 생활비 내고, 출산을 위해 필요한 목돈을 만들기 시작한다. 매달 나가야 하는 돈이 커진다. 개인 시간은 여전히 부족하다. 그래도 고액 연봉, 자가, 독일 중형 세단이 마음을 달래준다. 이렇게 정년까지 버티면 주택 대출 상환은 물론, 유동자산 20억까지도 모을 수 있다. 60살에 20억 갖고 은퇴하면 상가 하나 구매 가능하다. 허리띠 졸라매면 임대 수입으로 생활 유지가 가능하다. 품위유지는 어렵지만 어떻게든 살 수 있다. 60대 정년퇴직을 목표로 회사 생활에 최선을 다한다. 라인을 잡기 위해 회식 자리에 참석하고, 접대하고, 정치질한다. 모자란 실력을 성실함과 약간의 비열함으로 채운다. 60대 정년이란 목표를 이뤄야만 안락함에 이를 수 있다.



성공의 전형을 따른 평행우주의 나는 60살까지 공부하고 일한다. 동화의 결말처럼 그로부터 죽는 날까지 평안했답니다-로 끝난다 해도 행복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지금을 살아본 적이 없는 이가 평안할 지도 의문이다. 평행우주에선 목표를 위한 시간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대체한다. 그에게 묻고 싶다. 살 만했는지. 전형 밖의 삶을 산 나는 기꺼이 행복을 입에 올린다. 거부할 수 없는 불행이 인생을 집어삼켜 비참한 모습으로 죽는다 해도, 그간의 행복을 부정할 수 없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진 않아도 일상은 굴러간다. 충분한 여가를 누린다.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행복은 무엇인지 묻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 덕에 지금을 음미할 수 있다. 트랙 밖에도 삶은 있다. 밖에서야 보이는 삶이 있다. 밖에서 어떻게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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