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솔한 글을 썼다. 상대를 조롱하는 제목을 달고, 문단 몇 개를 덧붙였다. 쓰다 멈췄다. 나는 무례했다. 왜 이런 글을 썼는지 돌아본다. 아래 구분선 사이가 처음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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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상하수도 시스템, 보일러 기술, 화학 기술, 인체공학이 발전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욕실에서 그 혜택을 경험한다. 손잡이를 중앙에 놓고 당기면 샤워부스에서 물이 쏟아진다. 몇 초 만에 샤워하기 최적의 온도가 된다. 샤워부스 아래서 물을 맞으며 양치한다. 양치하는 동안 몸을 충분히 적신다. 양치가 끝나면 계면활성제를 듬뿍 넣은 샴푸를 머리에 뿌린다. 금세 풍부한 거품이 생긴다. 두피 이곳저곳에 거품이 스며들어 노폐물을 제거한다. 이어서 폼 클렌징과 비누로 전신을 닦는다. 10분 만에 이 사회가 요구하는 위생 관념을 지닌 문화인으로 거듭난다. 



위생 국가의 위생 관념은 높다. 매일 샤워하고, 하루 2,3 회 양치하고, 치실하고, 치석제거하고, 각질제거 한다. 바디 크림으로 온몸을 문지른다. 살비듬 떨어지지 않은 촉촉한 몸을 유지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보급된다. 선진국에 사는 모두가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청결 기준이 오른다. 이 쉬운 걸 왜 안 해? 해! 점점 체취와 살가루, 때가 불쾌한 것으로 거듭난다. 씻지 않은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가해자가 된다. 올라간 위생 관념은 지저분한 사람을 향한 질타의 근거가 된다. 



우리는 타인에게 지저분하다, 냄새난다, 씻어라- 요구하지 않는다. 문화인의 규범이다. 일부는 위생 관념이 나빠 인해 엄청난 체취를 풍긴다. 불만을 속으로 삭인다. 다수의 행인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닌가! 



시대의 로맨티스트를 만났다. 오늘 낮 최고 기온은 30도다. 집 밖을 나서니 후덥지근한 공기가 반겨준다. 단골 카페 히카리에 왔다. 커피를 시켜 천장형 에어컨이 있는 뒷층 테이블에 앉았다. 문명의 이기에 금세 적응한다. 에어컨이 없었던 시절을 상상할 수 없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눈에 띄게 강한 체취. 일주일 이상 감지 않은 머릿기름 냄새, 세탁물의 물비린내, 땀 찌든내가 섞였다. 머리가 어질하다. 호주는 선진국이고, 상하수도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됐다. 탭 워터를 곧바로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물이 깨끗하다. 대형 유통 체인을 이용하면 샴푸와 바디워시를 저렴한 값에 구매할 수 있다. 커피 한 잔 값으로 몇 달 사용할 샴푸와 바디 워시를 살 수도 있다. 위생 대신 커피를 택한 진정한 시대의 로맨티스트다.



에어컨을 포기한다. 에어컨이 나오지 않으며 트램이 뿌리는 먼지바람이 코를 간지럽히는 앞층으로 내려왔다. 땀을 식히기 위해 목까지 잠근 단추를 두 개나 풀고 소매 단추도 풀어 접어 올렸다. 옆자리 남성은 일반적 위생 기준과 다른 선택을 했다.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이 평소만큼 유쾌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대표적 불편 포인트는 구매한 재화/서비스가 돈값 못 했을 때다. 내가 6불을 지불하는 이유는 시원한 실내에서 맛있는 커피 마시며 작업하기 위함이다. 내 6불이 가치를 만들지 못 했다. 자본주의 국가에 사는 나는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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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약한 인간으로 세상의 기준을 학습한다. 그 편이 살기 쉽다. 모두와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 얻는 이득이 많다. 타인과 어울리기 쉽고, 상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쌓은 친분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도 하고, 중요한 때 우호적 관계를 만들 수도 있다. 체취는 나쁜 것이란 개념을 학습해, 냄새가 나지 않도록 일상을 조율한다. 같은 기준을 공유하는 이들에겐 좋은 인상을 주고, 공유하지 않는 대상에겐 불편을 느낀다. 그렇게 세상의 기준이 내 몸에 스며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감각에서 쾌, 불쾌를 가르는 건 학습이다. 예를 들면 겨드랑이 냄새, 속칭 암내가 있다. 어릴 땐 ‘엄마 냄새’라며 친근하게 느꼈다. 임시로 지은 집에서 살던 시절엔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샤워하기 어려웠고, 가족의 체취를 맡으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 냄새가 불편하단 생각조차 없었다. 사춘기 무렵 겨드랑이에 털이 나고 냄새가 나기 시작했을 땐 오히려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머릿기름도 마찬가지였다. 머리카락이 코팅된 것처럼 탄력 있고 좋았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고, 비위생 = 불쾌의 도식이 생겼다. 사회의 규율은 개인의 기호와 감각마저 조정한다.



문제는 글쓰기 방식이었다. 나는 대체로 구조를 짜지 않고, 지향점 하나만 찍어두고 손이 알아서 그곳으로 향하게 둔다. 사고의 이면을 확인하고, 사회 구조를 들여다보고 싶어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상대의 체취가 불편했다. 왜 위생관념이 없을까? 쓰다 보니 상황에 몰입하고 과격한 표현이 쏟아졌다. 내 맘대로 상대의 일상을 재단하고,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위생 대신 커피를 택한 진정한 시대의 로맨티스트’라는 구절까지 갔다. 문장에 타인을 향한 존중은 없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왜 내게 이런저런 규율을 들이대며 세상살이를 불편하게 만드는가. 평소 즐겨보던 SNL 코미디가 떠올랐다. 수년 전 유행한 말이 있다. ‘이거 나만 불편해?’ 누군가 불편함을 꺼내고, 동의를 얻으면 그건 비난의 무기가 된다. 사회의 동의가 비난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세상이 규율을 만들고, 종속된 구성원이 그것을 확대 재생산한다. 나도 모르게, 소수자—세상의 규칙에 덜 철저한 사람—를 폄하해도 되는 대상으로 취급했다.



아차 싶었다. 글쓰기를 멈추고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멀리 왔다. 사회학 독서모임에서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논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것이야말로 위선이다. 다정함의 출처가 되겠다는 각오는 빈말이 됐고, 고삐 풀린 손가락은 무례한 문장을 쉴 새 없이 토해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열한 문장이 몇 가지 사실을 시사했다. 내 문장의 가벼움, 다수의 기준을 강요하는 태도, 순응하는 정도에 따른 위계. 우리는 다양한 생활 조건에 놓이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지닌다. 다양한 삶의 양태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문명이 얼마나 발전했든 우리 삶은 빈곤해질 것이다. 그간 읽은 책과 쓴 글, 참여한 독서모임의 횟수가 무색하다. 말과 생각이 일치하지 않았다. 위선이다. 그간 한 사회적 발언은 빛 좋은 개살구다. 무례를 벗어나자. 다정한 글을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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