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란 의태어가 있다. 물건이 너저분하게 매달린 모양을 뜻한다. 내실 없는 말을 쉴 새 없이 뱉을 때도 사용된다. 주저리주저리 쓴다. 영양가 없는 말을 쏟아낸다. 정돈 되지 않은 글의 행간에 내가 있다.
로살리아라는 스페인 가수가 있다. 에스빠뇰로 노래한다. 에스빠뇰은 브라질을 제외한 남미 국가의 모국어다. 남미 노래는 라틴 팝이라 불린다. 라틴팝은 라틴 아메리카, 그러니까 남미 그 자체를 지칭한다. 유러피안 국가 출신이 라틴 팝을 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문화 착취란 오명을 뒤집어쓴다. 라틴팝엔 남미의 애환이 녹아들었다. 에스파냐는 식민 지배 가해자다. 가해국 출신이 피해국의 애환이 담긴 노래를 부른다. 비판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장르 대통합의 시대다. kpop도 다양한 장르를 흡수한다. 흑인의 애환이 담긴 힙합은 대다수 곡에 차용된다. 순혈 강조하는 조선민족이 에이 요, 쳌끼라웃을 외친다. 장르가 품는 범위가 확장됐다는 뜻이다. 여기서 다양한 맥락을 획득한다. 타지인의 라틴팝은 문화전유인가? 맥락은 알면 좋고, 몰라도 문제 없다. 문화 전유는 타문화의 문화를 무단으로 사용하는 행위를 뜻한다. 무단이 아니려면 허락이 필요한다. 허락의 출처는 어디? 흑인에게 힙합을, 히스패닉에게 라틴팝 사용을 허락 받아야 한다. 모든 흑인? 특정 흑인? 시대가 변한다. 라틴팝은 모두가 즐기는 음악 장르로 거듭난다. 로살리아 좀 봐주라.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제발 움직여. 싫은데? 부탁할게. 알았어. 고마워.
시간은 화살이다. 시위를 떠나 과녁으로 날아간다. 시위는 출생 과녁은 죽음. 요람에서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 짧다. 공중에서 쏜 것일까? 지면으로 향하는 화살이 중력 가속도의 도움을 받는다. 빠르다.
내 나이 36, 다음 달엔 34. 한국 나이 개혁 만세. 미래에 나는 젊어진다. 나이라는 틀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우리는 언어의 구조 안에 산다. 언어가 그렇다 하면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나를 의심한다. 결국 언어의 팔을 들어 올린다. 언어 판정승. 언어가 다음 달의 내가 2년이나 젊어진다 말한다. 언어는 관대하다. 아니 젊다는 것이 칭찬인 것인가? 왜 젊음을 찬사로 사용한 것일까? 우리 사회는 젊음에 큰 가치를 둔다. 무엇이든 할 수 있어. 가능성의 덩어리. 아프니까 청춘이야. 성장통 아프지? 그래도 너는 성장 가능해. 하지만 늙은이는 아니야. 가능성을 잃고, 중심을 잃고, 목소리도 잃고, 비난받고 사람들과 멀어지는 착각 속에 산다. 고령화사회에서 34살은 젊은이다. 이 사회 가라사대 젊음은 축복이야. 하지만 젊음의 후반전에 사는 내게 축복에서 멀어지는 감각이 안타깝다. 그렇기에 2년의 젊음이 축복에 몇 발짝 가까이 위치시킨다.
집중력 저하. 몰입 시간이 짧아진다. 사물의 소멸에서 저자가 말했다. 쉴 새 없이 한 정보에 이어 다른 정보가 밀려드는 곳에서 우리는 진실을 위한 시간을 가지지 못 한다. 탈사실적 자극 문화에서 소통을 지배하는 것은 흥분과 감정이다. 핸드폰 액정과, 랩탑 스크린과 이어폰에서 흥분이 폭발한다. 흥분 최고. 흥분은 중독성이 강하다. 흥분을 찾아 나선다. 연예인의 아름다움에 흥분, UFC 파이터의 안면 강타에 흥분, 판춘문예 마녀사냥에 흥분, 누군가의 몰락과 누군가의 성황에 흥분. 흥분 시대에서 글쓰기는 외면받는다. 글쓰기는 차갑다. 흥분에서 거리 두기를 해야 한다. 객관이란 룰에 맞춰, 합리라는 링 위에서 이뤄지는 스포츠다. 차갑게 잽 날리다가도 스크린에 기웃거린다. 흥분중독자는 흥분이 필요하다. 아 흥분 금단 증상이다. 유튜브 쇼츠 한 방 주입해. 디지털 질서는 진실의 시대를 종료하고 탈사실적 정보사회를 개시한다. 탈사실적 정보는 흥분의 화수분. 아무것도 확고하지 않은 곳에서 모든 멈춤이 사라진다. 학교폭력은 멈추라 해도, 흥분에게 멈추라 못 한다. 시간 집약적 글쓰기는 사라진다.
글은 바라보기를 전제한다. 천천히 오래 봐야 생각이 진행된다. 에머슨은 일자와의 합일이 이뤄지기 위해 자연과 영혼의 콜라보가 필요하다 말했다. 내 영혼은 자연과 친해질 수 없다. 자연 또한 바라보기를 전제하기에. 하염없이 머무르기(거주하기)는 시간 집약적 실행이다. 정보는 우리 호흡과 바라봄을 단축한다. 정보를 좇아 질주하지만 앎에 도달하지 못 하는 역설. 모든 것을 알지만 깨닫지 못 한다. 와 글 써야 하는데 손이 안 움직여. 언포기븐 뮤직비디오 보고, 로살리아 치킨데리야키 라이브 영상 본다. 온갖 곳에 달려가지만 단 하나의 경험을 하지 못 한다.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가 말했다. "파넴 엣 키르켄세스(빵과 경기들)" 대단한 구경거리가 사람을 마취시킨다. 스크린이 파넴 엣 키르켄세스다. 본다고 보는데 실체가 없다. 키보드 못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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