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2022
마쯔다
배화교의 신은 아후라 마쯔다다. "아후라"는 우리가 아는 그 아수라다. 종교 속에서 한 존재는 숭배의 대상이 되거나 공포의 대상이 된다. 배화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일본인 마쓰다가 본인 이름을 따 차 브랜드를 만들었다. 중간에 브랜드 영자 표기법이 바뀌었다. 세계화에 나서며 일본식 표기가 아닌 마후라 마쯔다의 표기를 차용했다. 나는 마쯔다 매장이다. 할 일이 없는 나머지 브랜드 나무위키를 읽었다.
이른 아침부터 마쯔다 매장을 찾았다. 마쯔다 멜번 시티점으로, 규모가 거대하다. 거대한 크기의 서비스 센터가 나란히 붙어 있다. 방문이 신차 구매 목적이면 좋겠으나 통장 잔고가 허락하지 않는다. 점검 서비스 받기 위해 왔다. 나의 차는 도요타다. 도요타 차는 마쯔다 센터에서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센터는 마쯔다 드라이버를 위한 공간이다. 그렇다면 범 일본 차 연합이 있는가? 물론 아니다. 자본은 국적이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지연의 특혜를 입어 이곳에 있다.
나는 차에 무신경하다. 차가 아이였다면 아동 학대죄로 기소당했다. 방임이 죄목이다. 사놓고 관리를 하지 않는다. 내가 차에 베푸는 자비는 눈에 띄는 얼룩이 닦는 정도다. 한 달 전에 최초로 바퀴에 공기를 넣었다. 공기압이 정상치의 절반으로 떨어져 있었다. 인터넷에 자문을 구했다. 심각한 상황임을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서비스 받은 날이 4년 전이다. 다른 부위 역시 바퀴와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 추측했다. 추측은 나쁜 상상으로 이끈다. 고속도로에서 110km로 달리다 바퀴가 빠져버린다든지, 주행 중에 보닛에서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나온다든지, 바퀴가 터져서 옆 차선 차와 충돌한다든지 하는 등의 장면이 떠올랐다.
점검을 받아야 할 때가 왔다. 매번 오가는 주유소 옆에 사설 서비스 센터가 있음을 발견했다. 조만간 날 잡고 방문할 계획이었다. 얼마 전 친구/사업 파트너들과 업무 미팅을 가졌다. 미팅이 끝나고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공기압 사건이 화두가 됐다. 그들이 내 차의 마지막 서비스가 언제였는지 물었다. 나는 대략 4년 전이라 말했다. 그들은 아연했다. 내가 연장자가 아니었따면 쌍욕을 먹을 분위기였다. 형이어서 다행이다.
공교롭게 자리에 있던 한 친구가 메카닉이었다.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내 차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당연히 당장 서비스를 받으란 말이 돌아왔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혹시 네가 주차장에서 긴급하게 상황을 점검해 준다면? 안 된다. 점검에는 점검 도구가 필요하단 대답. 본인의 센터로 차를 가져오면 차를 점검해 줄 수 있다 말했다. 친구의 일터는 마쯔다, 내 차는 도요타. 가능한 일이냐 물었다. 친구는 다소 눈치가 보이겠지만, 다소 귀찮은 일(도요타용 부품 주문 등)이 따르겠지만, 내가 정 원한다면 불가능하지 않다 답했다. 여기서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소 귀찮고, 다소 눈치 보이는-에 꽂혀 "너를 귀찮게 할 수 없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라고 답해야 한다. 나는 다소 염치가 없기에, -불가능하지 않다-에 꽂혔다.
이상 마쯔다 매장에 오게 된 경위다. 부킹 과정에서 내가 고려 못 한 귀찮음이 친구에게 가해졌다. 타 브랜드의 지인 차량 점검하는 게 상당히 눈치 보이는 일이었다. 결국 본인 휴일을 활용했다. 나는 고객으로서 비용을 지불하지만, 지인 할인 혜택을 받는다. 마쯔다 입장에서 돈 안 되는, 남 좋은 일, 고급 인력 낭비하며 해주고 싶지 않을 터였다. 친구 휴일에 불러서 노동을 시켰다. 염치없는 나도 보통 정신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민폐다. 자본주의 사회의 룰에 맞춰 친구에게 금전적 보상을 하기로 다짐한다.
드넓은 마쯔다 매장 라운지에 자리를 잡았다. 마쯔다는 고객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무료로 커피를 제공한다. 나는 고객이라기에 애매한 포지션임에도 염치 없이 커피 한 잔 뽑는다. 업무용 데스크에 랩탑을 펴고 블로그에 접속한다. 에어컨디셔닝 시스템이 재킷 없이 앉아도 무리 없을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 준다. 업무에 방해되지 않을 볼륨으로 노래가 흘러나온다. 커피 홀짝이며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여기가 물 온도 어떠세요, 아니 무릉도원이다. 온몸이 이완된다. 항문도 몸의 일부다. 나도 모르게 방귀가 나왔다. 뽕- 주위에 대여섯 명의 손님이 있다. 민망함에 속으로 상스러운 말을 뱉는다. 나는 어찌 이리도 염치가 없고 상식도 없는 것인가.
친구가 잠시 들려 중간보고를 했다. 한 타이어의 상태가 심각하기에 즉시 교체를 해야 한단다. 이런 걸 효능감이라 한다. 되려 문제가 없다면 실망스럽다. 종합검진 받을 때 초기 단계의 암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다. 많은 문제는 큰 효능감을 준다.
2. 너사와의 부재
너사와가 전날 저녁 시드니로 떠났다. 친척 동생이 호주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친척 동생의 호주 체류는 일주일이다. 전반전은 처남 부부가 거주하는 시드니, 후반전은 우리 부부가 거주하는 멜번에 묵는다. 와이프는 친척 동생을 환대하기 위해 시드니로 날아가 전반전도 함께 뛰기로 한다. 심장 두 개인 박지성 같은 지구력이다.
금, 토, 일에 걸쳐 여러 약속이 있다. 금요일엔 4년 만에 멜번으로 돌아온 동생을 만나고, 짧은 비즈니스 트립을 하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하우스 디너와 보드게임을 한다. 토요일엔 자동차 점검, 멋쟁이 도시 산책, 동년배들과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한다. 일요일엔 고양이 나비의 장기 보호가 시작된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어른으로서 자각을 가져야 한다.
전날 육인 분 식사를 준비했다. 간단한 음료도 제공했다. 시간이 지나 친구들이 동시에 자리를 떴다. 나는 친구들을 주차장으로 안내하는 과정에 재활용품을 처리했다. 몇 주 치 재활용 쓰레기를 취합했다. 두 명의 도움을 받아 모든 재활용 쓰레기를 전용 빈으로 던졌다. 집으로 돌아오니 싱크대와 주방 벤치를 채운 조리도구, 음식 담긴 식기, 컵이 맞아줬다. 혼자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남은 음식을 래핑하고, 설거지하고 주방을 정리했다. 세안도 꼼꼼히 하고 자리에 누웠다.
잘 준비를 끝내자 너사와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의 무사 도착을 축하했고, 나의 하루를 보고했다. 그녀는 나의 책임감 있는 하루 끝에 다소 울적해졌다. 말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본인이 없어도 배우자의 하루는 굴러가는구나. 남편의 정돈되지 않은 하루에서 본인의 필요를 느낄 터다. '내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안 되잖아. 내가 빨리 가서 이 엉성한 인간을 갱생시켜줘야겠군.' 이 즐거움을 뺏은 셈이었다.
와이프 만나며 책임감이 반타작 났다. 모든 고난을 나눌 전우의 존재는 든든하다. 릴랙스한다. 덕분에 다소 느슨한 삶을 산다. 혼자 살 때를 떠올린다. 사용한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설거지 거리는 만든 즉시 처리했다. 집에 물건도 최소화해서 어수선함을 미연에 방지했다. 숨겨왔던 책임감이 머리를 내민다. 인간의 생존 본능 같은 것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 혼자 있다고? 정신 똑바로 차려.
아침에 샤워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최근 타투이스트 친구가 본인 몸에 거대한 타투를 새겼다. 그녀의 보수적 부모님이 성내는 모습이 그려졌다. 우리 어머니가 떠올랐다. 몸에 문신 새길 생각도 하지 말라, 호적 파일 각오하라 엄포를 놨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몸엔 몇 개의 문신이 새겨졌다. 더 이상 나의 행동에 제약이 없다. 아버지는 자식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지적 할 사람이 없다. 이게 비극일까? 과거 사례를 봐도 그렇다. 맛탱이 간 왕 주위엔 따끔하게 일침 하는 충신이 없다. 민심을 돌볼 수 없다. 감언이설에 둘러싸이면 국정은 산으로 간다. 혼자 살 때 환경적으로 정돈되어도, 정서적으로 안정을 얻지 못 한다. 일상에서 지적하는 사람의 존재는 귀하다. 보통 이 역할을 가족이 맡는다. 그 지적을 달리 말하자면 관심이다. -네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네 맘대로 살아-라고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이다. 관심을 받지 못 하면 시들어간다. 그 관심의 영속성이 정서적 안정의 토대가 된다. 혼자인 나는 불안정하다. 주변이 정돈되든 말든 말이다.
19.07.2022
그제 친구와 글쓰기를 주제로 이야기 나눴다. 친구는 글과 친하다. 국문과, 대학신문 국장, 언론사 반 년 인턴, 국어 선생 출신이다. 본인의 글로 세상을 밝히고자 했다. 지금은 펜 대신 칼 들고, 문장 대신 식자재 다룬다. 추후 기회가 된다면 놓은 꿈을 되찾겠단다. 그는 유시민 작가에게 글을 칭찬받은 이력도 있다. 나는 곧잘 권위에 순응한다. 친구는 권위자의 보증을 받았다. 대화 상대로 더할나위 없다.
그는 타고난 문장의 힘을 역설했다. 작가에 이르는 두 단계를 말했다. 그에 따르면 많이 써야 한다. 이런 문장 저런 문장 쓰면 기술이 생긴다. 퇴고 과정에서 주어와 동사를 일치시키고,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적합한 비유를 찾는다. 다작이 중턱까지 안내한다면, 재능이 정상까지 안내한다. 다작을 통해 생각을 시각화 시키는 능력을 기른다. 나머지는 재능이 담당한다. 재능의 세공을 거쳐 글은 다이아몬드가 되거나 돌이 된단다.
친구의 기준으로 내가 쓴 글을 본다. 오호! 내 글솜씨는 바다다. 무수히 많은 돌을 만든다. 파도가 아무리 바위를 깎아도 다이아몬드 만들 순 없다. 블로그에 천 개 넘는 게시글을 올렸다. 지겹다. 생각 덩어리 세공은 매번 실패다. 천 개 넘는 돌을 모았다. 블로그 이름을 돌방으로 바꿔야 할까.
왜 쓴 기간에 부합하는 글을 쓰지 못 하는가? 나는 나를 잘 안다. 합리충으로 관심 있는 일에선 항상 인과를 찾는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나올 때까지 생각한다. 나의 인과 분석 알고리즘이 가동한다.
첫째, 느끼함을 향한 반감. 느끼한 음식은 좋은데 느끼한 글은 싫다. 느끼함은 감정의 과잉을 뜻한다. 다양한 느끼함이 있다. 나는 글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 엄밀한 논증이 필요한 글과 그렇지 않은 글. 후자의 경우 느끼함이 필요하다. 기준치 이상의 감정, 감성이 등장해야 시선을 끈다. 재미를 준다. 공감을 이끈다. 터져 나오는 감정의 홍수! 자 여러분의 심장을 어루만지는 눈물과 웃음 기쁨, 분노. 나는 글에서나 현실에서나 4와 6 사이의 감정을 유지하고자 한다. 여기서 0은 슬픔의 끝, 10은 기쁨의 끝이다. 툭툭 튀는 감정선을 억누른다. 돌출된 영역은 끝 맛이 안 좋다. 지속성도 별로다. 10 찍는 사람은 0도 찍는다. 감정도 기브 앤 테이크다. 0은 나를 파괴한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다. 이런 가치관과 경험이 한데 어우러져 반느끼 전선(Anti-cheesy line)을 구축했다. 반느끼 전선엔 후회가 없다. 그리고 임팩트도 없다.
둘째, 경험 부족. 나는 경험이 부족하다. 새로운 환경에 좀처럼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MBTI 테스트의 첫 번째 결과는 E다. E는 Extroversion의 약자로 외향성을 뜻한다. 나는 외향적이다. 처음 만나는 상대와 대화 나누는 데 자연스럽다. 새로운 만남도 즐긴다. 했던 일 또 하는 걸 좋아한다. 모순이다. 새로움을 좋아하지만 똑같은 일상 반복하는 것도 좋아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재밌다. 다만 만날 일 자주 만들지 않는다. 아는 맛에 끌린다. 효율을 따지는 내 성향 탓이다. 나는 50%의 큰 즐거움보다 100%의 적당한 즐거움을 택한다. 여기서 왜 효율이란 말이 나왔는지 궁금할 것이다. 우선 큰 즐거움이 적당한 즐거움의 2배가 안 된다. 또한 실패는 0이 아니라 마이너스기 때문이다.
숫자가 이해에 도움이 된다. 적당한 즐거움이 10이라면, 큰 즐거움은 15다. 50%로 15를 얻지 못 할 경우, 기분은 -5가 된다. 자 2번 새로움 선택해서 한 번은 성공, 한 번은 실패인 경우를 가정하자. 이때 내가 얻는 즐거움은 10이다. 15 -5 = 10이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아는 그 맛, 확실하고 적당한 즐거움을 택한 경우를 가정한다. 2번 다 성공한다. 내가 얻는 즐거움은 20이다.
많은 경우 나는 도박하지 않는다. 확실한 즐거움과 미지의 큰 즐거움 사이에서 전자를 택한다. 다시 말해 한 거 또 한다. 아는 사람 만나, 아는 곳 가서 아는 음식 먹는다.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기대한 만큼의 즐거움을 얻는다. 결과적으로 행복의 최대 효율을 따지기에 경험이 부족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다양한 경험이 양념이 되어 글맛을 살려줄 텐데 그럴 수 없다. 대체 경험(책)을 통해 말한다. 생생함이 덜하다.
내 기본 성향과 바꿀 수 없던 환경이 더해져 이런 내가 됐다. 특성을 고려한 결과, 나는 엄밀한 논증을 요하는 글과 더 가깝다. 더 가깝다고 해서 잘한다는 것은 아니다. 엄밀함은 합리성, 풍부한 배경지식, 노력이 어우러져야 나온다. 나의 글은 적당한 합리성, 빈약한 배경지식, 전무한 노력의 합이다. 합리성과 지식은 쌓을 수 있는데 게으름은 어찌할 수 없다. 천성이 게으르다. 요컨대 좋은 글 쓸 수 없게 타고났다.
탁월한 메타인지 능력을 통해 탁월한 글을 쓰지 못 하는 자신을 분석했다. 글쓰기 자아에 사형 선고를 때린다. 후후후 넌 절대 좋은 글쓴이가 될 수 없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너의 문장은 이도 저도 아닌 상태를 벗어날 수 없지. 그래도 쓴다. 글쓰기 목적은 우수한 문장 만들기만이 아니다. 우수한 문장을 못 만들어도 여러 혜택이 있다. 일단 즐겁다. 아웃풋 만드는 과정에서 주제에 대한 이해가 생긴다. 참가 이유로 충분하다. 재능 없는 문장 챙겨 글쓰기 개근한다.
21.07.2022
긴 글을 쓰려 했다. 컴퓨터 화면을 한동안 쳐다봤다. 손은 요지부동. 포기. 제목 칸에 '메모' 두 글자를 넣는다.
2. 문장이 완전할 필요 없다. 어쩔 땐 단어 하나, 어쩔 땐 주어 없는 목적어와 동사, 어쩔 땐 동사 하나와 마침표. 넓게 마침표와 마침표 사이 말을 문장이라고 한다. 한 단어도 문장이다. 문장에 꼭 주어와 서술어 넣을 필요 없다. 종종 절름발이 문장에서 글맛을 느낀다.
문장으로 롤러코스터 타이쿤 한다. 굴곡을 만든다. 마침표 사이에 일 음절 단어를 넣고, 바로 다음에 겹문장을 사용해 한 문단 분량의 문장을 이어붙인다. 변칙적인 상승과 하강. 장면 전환이 빠른 액션 영화에서 여백의 미를 좋아하는 일본 영화로 넘어간다. 차량이 부딪히고 폭발하고, 레일을 이탈하고, 드라이버의 조급한 표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어느 시골 마을의 원경을 롱테이크로 담는다.
몇 년 전인가 모르는 사람이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했다. 비슷한 시기 내가 서평가 금정연을 팔로우하고 댓글을 달았다. 그 모르는 사람은 금정연과 맞팔이다. 추측건대 그는 내 댓글인지 서평인지(확실치 않다)를 보고 팔로우를 했다. 나를 팔로우한 사람이 궁금해졌고, 상대 계정에 접속했다. 사진과 책 좋아하는 취미가 겹쳤다. 피드에 작품 사진과 문장이 한가득 실렸다. 아하 우린 동류다. 그를 팔로우했다.
이상 모르는 사람과 3년 정도 팔로우를 이어온 배경. 서로 피드에 좋아요 눌러준다. 그는 자주 피드에 서평을 쓴다. 서평을 안 쓰면 본인의 일상을 쓴다. 쓰는 방식이 시적이다. 두서없다. 문장이 지맘대로다. 그 자유분방한 글에서 리듬이 느껴진다. 시 같기도 하고, 뻘소리 같기도 하다. 분명히 문장 좀 만져본 사람이다. 글맛이 좋다.
나는 문장의 주술관계를 잘 맞춘다. 형식도 잘 따른다. 양괄식 구조를 사용한다. 거의 모든 문장을 프랩 구조에 맞춘다. 주장 근거, 예시, 주장을 반복하며 문단을 끝낸다. 논리적 글쓰기를 추구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원칙에 맞는 말, 말이 되는 말, 효율적인 말을 찾는다. 그놈의 합리 합리 합리 타령 지겹다. 의식의 흐름에 맞춰 글을 쓴다. 손가락 가는 대로 냅둔다. 열 손가락이여, 여백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라! 의식의 흐름법은 원칙에서 벗어난 글을 쓰기 위함이다. 묘하게 그 난장판에 질서가 있다. 이제 아수라장도 의식해야 만들 수 있다.
모르는 사람(SNS 계정 아는 사람)의 부스러기 글에 감명받아 남김.
2. 일상 공유 방식
너사와와 멋진 SNS 활용법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여기서 '멋진'은 주관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멋진 사람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갓생 사는 사람. 인스타그램이든 페이스북이든 안 하는 사람이 최고다. SNS의 가장 본질적 쓰임은 나 전시하기다. 남에게 나를 알리고 싶은 마음의 발로다. 모두가 관종이다. 원하는 관심의 양이 다를 뿐이다. 많은 관심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 건강하다. 자립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관심 없어도 하루를 완성시킬 수 있다. 멋진 SNS 활용법이 주제이기에 이 가장 멋진 인간을 논외로 할 수밖에 없다. 일단 피드에 뭐든 올리는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
내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선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본인 얼굴 사진을 (거의) 올리지 않아야 한다. 이런 사람은 외모를 자랑거리로 다루지 않는다.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모두 자기 사진을 피드에 올린다. 대체로 현실보다 나은 버전의 나를 전시한다. 상대가 이렇게 봐주길 바라면서. 사진 안 올리는 사람은 괴리를 만들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속이지 않는다. 정직함이 좋다. 덧붙여 내세울 게 외모뿐이라면 그것도 후지다. 그런 후짐이 없어 좋다.
사치품(서비스 포함)을 올리지 않아야 한다. 자본주의 세계다. 자본이란 저울 위에서 구체적인 무게가 측정된다. 무거운 상품, 무거운 서비스로 피드를 가득 채우는 행동은 구리다. 자기 확신이 없다. 나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가장 쉽고 폼 안 나는 방식이 물건의 권위를 빌려오는 것이다. 벤츠 엠블럼이 보이는 핸들샷, 올라간 팔에 감긴 롤렉스, 뱀 그려진 구찌 파우치. 나를 전시하는 공간에 상품을 세운다. 이미지를 나로 봐달라 요구한다. 상품이 대체한 피드엔 독자성을 지닌 '내'가 없다. 뭐가 됐든 나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봐줘. 자 비싼 차, 비싼 액세서리, 비싼 옷, 비싼 호텔 사진 봐봐. 이것도 저것도 전부 비싸. 이걸 이용하는 나도 비싼 거 맞지? 나도 비싸다고 해줘. 본인의 가치를 물건에서 찾으려 한다. 물건이 컨펌 해줄 수 있다는 듯이. 사실이긴 한데, 반대쪽으로 컨펌한다.
나 피셜 멋진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취향과 취미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피드다. 한 가지 조건을 달자면, 발전하는 성질을 띄어야 한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성질은 꾸준함이다. 천재성을 요하는 예술이나 체육 분야를 제외하면, 거대한 성취의 대표적 출처는 꾸준함이다. 꾸준한 사람은 거대한 뭔가를 만들 자질이 있는 사람이다. 꾸준함에서 그 포텐셜을 본다. 내게 너사와의 SNS는 좋은 예다. 그녀 피드의 90% 이상이 건물 사진이다. 건물 덕후로서,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를 지닌 건물의 이미지를 수집한다. 수집한 이미지를 선별해 인스타그램에 전시한다. SNS 계정에 덕질의 역사가 담겨 있다. 덕업일치의 표본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커리어에 활용한다. 건물에 있어서는 알파고다. "저 건물 언제 만들어진 거야?" 물으면 지어진 시대와 사용된 건축 양식, 시대적 배경, 지역의 특성 등을 술술 읊는다. 거대하다.
다른 예로는 위 글에 나온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의 피드의 90%가 책, 사진이다. 사진집, 소설, 시, 비문학 등으로 가득 찼다. 사진과 글을 향한 꾸준한 관심을 느낀다. 선별한 사진을 보면 이미지 언어 독해 능력이 보인다. 사진(거리, 도큐멘트 사진에 한정하지만)을 좋아하는 사진 매니아로서 말한다. 사진도 아는 만큼 보인다. 많이 알면 즐길 거리가 더 많아지다. 최초에는 시각적 임팩트에 반응하다. 기계가 주는 압도적 느낌. 빡센 아웃포커싱, 수백만 원짜리 렌즈가 만드는 오렌지 형태의 보케(빗망울)에 박수친다. 사진에 이해가 깊어지면 이미지 퀄리티 보다 텍스트에 감탄하게 된다. 일전에 이동진이 말한 어려운 영화의 필요가 여기 부합한다. 어려운 영화는 단순히 감독의 지적 허영 채우는 목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모두에게 즐거움 주는 대중오락 영화가 있는 반면, 높은 영화 언어 독해 능력을 요구하는 예술 영화도 있다. 후자의 경우 영화 기법은 물론,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한다. 눈 높아진 관객의 니즈를 만족시킨다. 높은 허들에 고상하다는 표현을 쓴다. 취향의 고상함이 엿보인다.
결론을 말하자면, 피드의 출처가 '누구나'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살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나 상품은 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지 못 한다. 오랜 시간과 꾸준함이 만들어낸 아카이브, 그 안에서 엿보이는 거대함의 자질(고상함으로 쓸 수도 있을 듯)이 나의 고평가를 부른다. 근데 내가 뭐라고?
27.07.2022
명상
명상이 필요하다. 글쓰기가 명상이다. 글을 쓰면 답답한 마음에 한숨 돌릴 공간이 생긴다. 한숨 쉴 필요를 느꼈고, 마침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차가 골머리 썩인다. 돈이 살살 녹는다. 열흘 전에 차량 서비스 받으러 갔다. 마쯔다 센터에서 글 쓴 기록이 있다. 그 이후로 차에 돈을 발랐다. 서비스 비용을 내고 이틀 뒤, 바퀴 3개를 교체했다. 점검에서 바퀴 상태가 안 좋았던 걸로 밝혀졌다. 바퀴를 교체하고 이틀 뒤 교통사고가 났다. 대로에서 골목으로 좌회전하는데 SUV 차량이 내 차 왼쪽 뒷좌석을 들이받았다. (상대는 내가 가만히 있는 차를 들이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오늘 차가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퍼졌다. 퍼졌다란 말은 시동이 꺼져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됐음을 뜻한다. 변속 기어가 P에 가 있어 고속도로 밖으로 끌어내지 못 했다. (후에 알았지만 기어 옆에 있는 작은 버튼을 누르면 중립으로 옮길 수 있었다) 40분을 고속도로 한구석에서 서 있었다. 견인차의 도움을 받아 서비스센터에 차를 맡겼다. 며칠 걸릴지 모른다는 말에 이번 주 방문할 집에 스케줄 취소 문자를 돌렸다. 차에 천오백 불 정도 들었고, 이번 주 일을 못 하게 되며 천 불 정도 손실이 생겼다.
나간 돈, 나갈 돈을 계산하다 보니 쓴웃음이 나온다. 그제 장고 끝에 한국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얼마 전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입원하셨다. 고생하신 아버지 얼굴 보는 게 아들 된 도리다. 부자유친 실행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올해 집을 사는 바람에 저축을 탈탈 털었고, 고정 지출이 커졌다. 부자유친 실천을 미루려 했다. 와이프의 오랜 설득 끝에 짧게라도 귀국하기로 했다. 나는 천상 불효자다. 돈 나가니 최소한의 효도마저 후회된다. 돈이 참 비정하군.
돈을 중심으로 한 이런저런 문제로 머리가 아프다. 스타벅스에 새로 나온 커피 빈 맛본다고 50센트를 추가했다. 시티에 나와 돈 쓰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명상이 필요하다. 심신미약 상태다. 처방전을 받는다. 카페에 앉아 커피 마시며 글 쓰세요. 생각 정리하고, 손가락 스트레칭도 하고, 시간을 키보드로 박제한다. 공백에 글자 넣는 일이 꽤 많은 역할을 한다. 명상이라 하면 눈 감고 가부좌 틀고, 호흡의 이동 경로를 확인하고, 내가 가진 문제를 더듬고, 생각을 잊는 일련의 행위를 뜻한다. 글쓰기는 눈 뜨고 의자에 앉아 커피 마시며, 블로그에 하소연하고, 개인 문제와 관련 없는 화제를 다루는 행위다. 본질은 보통 뒤에 나온다. '빨간 컵'은 컵이 본질, '비싼 집'은 집이 본질, '맛있는 음식'은 음식이 본질이다. 이런 맥락에서 명상과 글쓰기의 본질이 통한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를 마주하고, 일상과 관련 없는 어떤 일을 논하는 행위다. 조금 더 활동적인 명상이다.
2. 친밀함과 싸가지의 경계
일전에 타이어 교체한 곳에 차를 맡겼다. 바가지 씌우지 않고, 친밀한 사장의 태도가 떠올라 재방문 했다. 그는 보통 백인 호주인보다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삼성, LG, 현대, 기아 제품을 칭찬하고 몇 마디 한국말을 했다. 내 손에 쥐어진 아이폰을 보고 넌 왜 삼성폰 안 쓰냐 면박을 줬다. 훨씬 좋은 폰이 있는데 왜 아이폰을 쓰는 거야 정신 차려! 국뽕을 즐겨 마시는 나는 그의 면박에 웃음으로 대꾸했다. 아는 것을 선호한다. 가본 곳 또 가고, 먹었던 것 또 먹고, 만나던 사람 또 만난다. 재방문은 자연스러웠다.
두 번째 방문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가 친밀함을 표하는 방식 때문이다. 틱틱대는 말투가 더 이상 좋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알터네이터에 수리가 필요하다 말했다. 그는 말했다. 네가 진단한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 보험사 직원이 한 말이라고? 그건 봐야지. 수리 얼마나 걸리냐고? 해야 할 게 많고 변수가 많다. 너의 질문은 이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결과만 내놓으라고 하는 거다. 묻지 말고 기다려라. 연락 주겠다. 내가 먼저 전화하지 않으면 매장에 전화하지 말고.
묻지도 말라고? 내 물음은 어리석은 질문으로 전락했다. 대략적이라도 알아야 했다. 업무용 차량이다. 일을 하려면 필요하다. 알아야 고객에게 바뀐 스케줄을 안내할 수 있다. 동일한 대답이 왔다. 현재 상태로는 알 수 없다. 차 맡기고 집에 가라. 카네기 인간관계론 기본 원칙 1. 남을 절대 비난하지 마라. 머릿속에 참을 인을 세 번 새기고 발길을 돌렸다. 데일 카네기 선생님이 안 말렸으면 피바람 불었다.
그는 떠나는 내게 An-nyeong!이라며 한국어 인사를 건넸다. 나는 속으로 시발이라 답하고, 입으로 오케이 바이라 말했다.
종종 친밀함은 매너의 기준을 낮추는 데서 나온다. 매너는 인사치레의 다른 말이다. 우리가 인사치레할 사이야? 서로 '눈치 보는 말 생략해도 이해 가능'이란 인식이 오가면, 나쁜 매너는 친밀함으로 다가온다. 가벼운 면박도 비슷하다. 친구들끼리의 장난이나 친밀함의 표시다. 가벼운 면박을 상대가 불쾌하게 느끼면 친밀함은 싸가지 없음으로 변한다.
친밀함이 싸가지 없음으로 전락한 원인은 내 마음 상태다. 운전에 생계가 달려있다. 그의 핀잔을 웃으며 받아들일 수 없다. 수리가 하루 늘수록 손해도 커진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그의 말이, 말투가 고깝게 들린다.
3. 고전 깨기
고전 세 권을 연달아 읽었다. 프랑켄슈타인, 그리스인 조르바, 로빈슨 크루소(진행 중)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경우 분량이 상당해 읽는 데 며칠 걸렸다. 리뷰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좋은 책이다. 가상의 타자를 설정해 인간을 본다. 소설의 쓰임과도 같다. 우리는 중간재를 통해 우리 삶을 돌아본다. 이데올로기나 철학, 이야기가 주로 쓰인다. 이야기 중에서도 인간을 관찰하는 다른 종이 등장하면 존재 확인 작업이 수월해진다.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 걸음 떨어진다. 떨어진 거리를 통해 형식적으로나마 객관을 취한다.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형태를 한 피조물을 만든다. 결과물의 외형은 끔찍하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을 버리고 저주했다. 책에는 인간적인 마음을 지닌 피조물이 흑화하는 과정이 담겼다.
흑화한 피조물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 분노는 인간의 부조리함에 향한다. 피조물의 분노는 소설 밖 대상도 지목한다. 가장 거대한 분노는 고난의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만들고 방치한 창조자다. 원하지 않은 삶을 주고, 책임을 회피하며, 온갖 부조리를 마주하게 만든 인물. 근대 합리주의 시대의 저자는 피조물의 입을 빌려 신에 분노를 터트린다. 삶은 고통이다. 생존 본능은 고통을 감수하게 만든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 존재, 신에게 버림받은 존재의 절규가 염세적 세계관을 대변한다.
피조물은 높은 지능과 우월한 신체 능력을 통해 인간사를 배운다. 고전을 훔쳐 들으며 인류가 만든 위대한 성취를 하나둘 학습한다. 사고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그는 인간의 행동의 이유를 끝없이 질문한다. 우리가 마땅히 던져야 했던 질문이다. 타자의 입을 통해 관성에서 벗어난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 왜 계급이 있는가? 어째서 신은 인간을 다르게 만들었는가? 누군가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토대를 얻은 채 태어나고, 누군가는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태어난다. 이들 사이에 어떤 기준이 있는가? 다시 말해 모든 불행과 기쁨엔 이유가 있는가? 스펙터클 뒤에 숨은 질문이 끊임없이 독자를 쿡쿡 찌른다.
니체 책 제목처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피조물은 고난과 사투한다. 부조리는 분노로, 분노는 삶의 이유로 이어진다. 창조자의 삶을 파괴하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이 생을 지탱한다. 피조물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철저하게 타인의 행복을 박살 낸다. 그런 행동이 자신을 지옥으로 이끈단 사실을 알지만 멈출 수 없다. 분노란 전차는 목적지에 이르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이유를 찾으려는 게 인간이다.
대사도 인상적이다. 피조물의 마지막 일갈에 비장미가 잘 녹아 있다.
"잘 가라, 프랑켄슈타인! 네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리고 내게 복수심을 품고 있다면, 내 죽음보다 삶을 보고 만족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내 고통은 네 고통보다 훨씬 더 컸다. 죽음이 영영 차단해 줄 때까지, 쓰라린 회한의 고통이 내 상처를 계속 헤집어 놓을 테니까. 하지만 곧, 나는 죽을 것이다."
쉼표 활용이 기막히다. 하지만 곧, 나는 죽을 것이다. 곧 무슨 일이 일어나길래 뜸을 들이는 거야? 꿀꺽. 헐 죽을 생각이구나. 뉘우치고 한탄할 것을 알면서도 거사를 치를 수밖에 없던 그의 슬픔이 드러난다.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는 방식은 죽음뿐이다. 이야기는 존재론적 비극이다. 대사가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주인의 도덕을 체화한 인물을 그렸다. 어쩌다 보니 또 니체를 인용한다. 마침 니체는 고대 그리스인인을 주인의 도덕을 가진 인물로 묘사한다. 니체가 말한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은 이렇다. 주인의 도덕은 힘을 향한 의지,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할 수 있는 주체성에서 나오는 도덕을 말한다. 인간의 힘을 고양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주인이다. 노예의 도덕은 반대다. 누군가의 선악 규정에 휘둘리며, 복수심과 원한에 의해 성립하는 도덕감이다. 복수심과 원한은 그 대상을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노예는 피동적 인물이다.
조르바는 본인의 선을 따라 산다. 누군가의 기준에 기대어 사는 대신 기꺼이 지옥에 떨어지길 원한다. 그의 마지막 말을 보면 그의 이런 태도가 잘 드러난다.
"신부 나부랭이가 찾아와 내 참회를 듣고 고해성사를 하려 하면 차라리 내게 저주를 내리고 얼른 꺼지라 해요! 살아생전 안 해본 일 없이 다 해봤지만, 아직 못 한 일이 있소. 나 같은 사람은 한 천년은 살아야 하는데... 편안히 주무시오!"
화자인 '나'는 고전을 탐독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길 원한다. 책이 내려줄 이정표를 찾아 독서와 집필을 이어간다. 본인의 욕망을 끝까지 억누른다. 욕망과 선을 그은 합리의 세계에 산다. 그는 합리의 대변인이자, 피동적 인물의 대표로 등장한다. 다만 능동적 인물인 조르바를 존경하며 감탄하기도 한다. 첫 만남부터 조르바에 호의를 품고 여정을 함께 하길 원한다. 주인의 도덕에 경외할 수 있는 정도의 소양이 있는 인물이다. 조르바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번에 알아본다. 결국 대비의 대상, 조르바의 건강함을 깊이 있게 해석할 인물로 등장한다.
저자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대범한 구석이 있다. 조르바의 힘을 빌려 예수에 도전한다. 예수가 승리한 사회, 기독교 사회가 배경이다. 여기서 조르바의 영웅적 행위를 예수의 행위와 병치시킨다.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란 말로 유명한 일화가 소설에 그대로 등장한다. 온 마을 사람이 남성을 유혹하고 죽음으로 이끈 죄를 물어 한 과부를 처형하려 한다. 여인들은 돌을 던지고, 마을 치안의 대표인 방범대장은 칼로 과부를 참수하려 한다. 광기의 하 가운데 조르바가 뛰어든다. 점잖은 예수와 다르게 미친 듯이 날뛰며 과부를 보호한다. 방범대장과 드잡이질을 하고 피를 뿜으며 폭력으로 과부를 지킨다. 노예의 도덕의 상징인 예수와 주인의 도덕의 상징인 조르바를 같은 단상 위로 올린다. 노골적으로 묻는다. 너희의 예수가 선인가? 아니면 날뛰는 이 사내가 선인가?
조르바 역시 한때 국가, 이념, 종교, 관습의 영향 아래서 고통받는다. 결국 나름의 답을 찾는다. 어중간한 것은 없다. 매사 온 힘을 다해 삶을 마주한다. 이 백 프로의 사내의 삶은 분투란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게 인생을 잘 알면 본인이 글을 쓰는 게 어떤가요?라는 화자의 질문에 조르바는 답한다. 글을 쓸 수 없다. 있는 힘껏 삶을 사느라 바쁘다. 그의 도덕관은 21세기와 꽤나 어긋났다. 나는 정치적 올바름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에 호응한다. 이 시대에 안티 페미니스트이자, 폭력적이며 충동적인 그가 설자리는 없다. 조르바 형님~ 나도 어쩔 수 없는 피동적 인물인가 봐요~. 그럼에도 있는 힘껏 삶을 살아가는 그를 보며 경외를 느낀다.
오십 프로로 사는 군상에게 백 프로 인간이 보내는 교훈이 녹아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보는 중이니까 함구하겠다. 사실 곧 떠날 시간이다. 시간이 없네.
29.07.2022
제목을 공백으로 남겼다. 볼륨 있는 글을 쓸 것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정 분량, 일정 노력이 들어가면 글은 제목을 얻는다. 메모1,2의 소제목이 아니라 게시글 전체를 담당하는 이름 말이다. 그런 글 볼 수 있겠죠?
없었다.
2. 로빈슨 크루소
로빈슨 크루소는 대단하다. 인간 로빈슨 크루소의 인생도 대단하고, 분량도 대단하다. 읽는데 오래 걸렸다.
잘 알려진 고전을 읽을 때 종종 의외성에 놀란다. 로빈슨 크루소는 표류한 인간의 상징이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름 뒤에 무인도라는 단어가 조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나도 '누구나' 중 하나였다. "아, 그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 알지." 어릴 적 동화책에서, 학교 수업에서, TV 에니메이션에서 각색된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물과 실제 책 속 인물은 꽤나 다르다. 독서는 실감의 과정이다.
그 원인은 몇 가지 있다. 우선 분량이다. 원작의 로빈슨 크루소는 단독 주연으로 400 페이지를 이끈다. 무수히 많은 시행 착오를 목격한다. 또한 인물의 정서를 파악하기 유리하다. 표류자 신앙의 변천에서 인물의 깊이나 개성을 목격한다. 사람은 비슷하며 다르다. 극단의 상황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특히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왜?라는 질문을 타고 타고 올라가다 보면 나를 구분짓는 가장 큰 질문과 마주한다. 삶의 본질에 대한 대답은 한 인물을 근원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돕는다.
31.07.2022
황홀함
감정엔 이름표가 있다. 슬픔, 기쁨이라는 큰 이름표부터, 비통, 애탄, 경외 등의 작은 이름표까지. 이름표의 크기는 범주의 크기와 비례한다. 대체로 기쁘다는 좋은 감정의 총칭이다. 일하다 박하사탕 하나 집어먹는다. 달달하다. 기쁘다. 미국 여행 갔다 슈퍼볼 복권에 당첨됐다. 2천억 원을 벌었다. 기쁘다. 기쁘다는 사소한 달달함부터 거대한 인생 역전까지 포괄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단어와 쓰임을 학습한다. 기쁨의 다양한 층위를 깨닫는다. 기쁨에도 장르가 있다. 장르 내에서도 깊이가 다르다. 기쁨을 느낀다. 기쁨으로 쓰기엔 부족하다. 너무 부족한 나머지 틀리다. 적합한 이름표가 있다. 확실한 대안은 뭉퉁그린 감정을 오답으로 정의한다.
지금 이 시간이 황홀하다. 황홀이란 감정은 목적어를 요구한다. 특정 사물이 주는 감정이 아니다. 모든 게 어우러져 느끼는 감정이다. 모든 것의 집합인 '지금 이 시간'을 목적으로 삼는다.
눈이 부셔 정신을 못 차릴 순간은 비슷한 패턴으로 찾아온다. 새벽에 일어난다. 자는 와이프를 위해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온다. 거실 통유리로 깜깜한 도시를 본다.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린다. 에스프레소를 들고 서재로 온다. 랩탑을 편다. 커피 마신다. 무언가에 집중한다. 무언가는 사진, 게임, 독서, 글쓰기 중 하나다. 오늘은 책과 게임이다.
5시간 뒤에 독서모임이 있다. 내가 발제한 책을 중심으로 모임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북의 청취 기능을 사용해 책 내용을 정리한다. n 회차 독서는 오십 프로의 집중력으로 충분하다. 나머지 절반의 집중력을 창세기전3에 사용한다. (살라딘이 시반 블레이드로 전직했다. 시반 블레이드는 최종 직업이다. 릴렌트러스란 패시브 덕에 한 턴에 두 번 행동한다. 시반 블레이드에선 시미터 특수 범위기인 혈랑마혼을 사용할 수 없다. 대신 히랄 하를로데란 검을 착용해 마룡광아탄을 사용한다. 검에 내장된 특수기로 혈랑마혼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살라딘이 최종 필살기인 천지마열무를 얻기 전, 혹은 마장기나 탱크를 상대할 때 사용된다.)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신다. 살라딘으로 마룡광아탄을 사용해 탱크를 부쉈다. 고통과 가난의 서열화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듣는다. 황홀하다.
이어폰
아뿔싸! 이어폰이 없다. 이어폰을 충전기에 꽂아 놓고 나왔다. 무의식을 믿고 주머니를 뒤진다. 없다. 가방을 뒤진다. 없다. 진짜 없다. 이어폰은 이제 신체 일부다. 신체를 두고 왔다. 별주부전의 토끼도 아니고 이 무슨 일인가.
이어폰을 통해 팟캐스트를, 유튜브를, 노래를 듣는다. 이어폰이 없으면 어떤 것도 들을 수 없다. 집 밖 전자기기 스피커 사용은 에티켓이 아니다. 에티켓을 지키는 문화인으로서 안 될 일이다. 뉴진스의 신곡 어텐션과 하이프 보이를 듣기 위해선 핸드폰 스피커 볼륨을 제일 낮게 설정하고 귀를 스피커에 붙여야만 한다. 그 정도로 듣고 싶진 않다. 결국 뭐가 됐든 기계음을 들을 수 없다.
이어폰 의존증이다. 귀에 이어폰 꽂지 않으면 불안하다. 의존증이라는 말에 부합하는 매일을 보냈다. 이어폰 잊은 날은 일 년에 한두 번이다. 그날이 오늘이라니.
2. 독서모임
독서 모임을 했다. 내가 발제한 카롤린 엠케의 '혐오 사회'를 다뤘다. 모임에서 한동안 사회학 책을 다루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발제 도서 선정 이틀 전에 혐오 사회를 읽었다. 내용이 괜찮았다. 추천했고, 회원들이 동의했고, 결정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멜번리딩홀엔 세 개의 축이 있다. 독서모임이 5년 이상 지속되려면 고정 참여자가 필요하다. 세 개의 축은 세 명의 고정 참여자를 뜻한다. 모임이 5번 열린다 하면, 4번은 위 세 명만 참석, 나머지 한 번은 세 명 +@다. 세 명이기에 유지되는 구조다. 한 명이라도 이탈한다면 모임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독서 대담이 될 것이다. 두 명 참석한 자리를 모임이라 말하기 머쓱하다.
입에 신물 나왔다. 모임의 형태를 지녔으나 사실상 독서 대담이었기 때문이다. 한 축이 심신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참석이 기적일 정도였다. 일시적 난독증을 얻었단다. 그는 발제 도서뿐 아니라 모든 읽기를 멈췄다. 모임에서 묵언수행을 했다. 배경으로 존재했다. 결국 나와 다른 한 축의 혓바닥 두 개가 두 시간을 채웠다. 나는 오늘의 호스트다. 모임이 만족스럽지 못 하다면 내게 책임이 있다. 필사적으로 할 말을 생각하고 질문했다. 할 말이 없어도 말을 했다. 입이 쩍쩍 마르고, 기력도 쫙쫙 빨렸다.
책을 읽은 참여자 둘은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좋은 책은 크게 두 종류다. 전에 없던 발견을 다루는 책과 전에 있던 발견을 잘 취합한 책이다. 혐오 사회는 후자다. 기존 담론을 잘 짜인 구조 위에서 충실히 논증했다. 저자 본인이 기득권이자 소수자의 신분이다. 당사자성과 학자로서의 통찰이 적절히 섞였다. 몇 가지 중요한 케이스 스터디를 토대로 글을 이끌었다. 그 안에 있는 혐오와 계급화의 매커니즘을 분명하게 밝혀냈다. 기존 것 다루는 저자의 능력을 칭찬하며 시작했다.
책 설명을 더한다. 책의 목적은 혐오는 나쁘다란 막연한 말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혐오는 증상이다. 원인이 아닌 결과이다. 혐오 사회는 혐오 원인을 분석한 책이다. 혐오의 토대는 멸칭, 사고와 분류에 사용되는 연상과 이미지, 범주화다. 지칭하는 말이 생기면 혐오 대상은 구체성을 띤다. 멸칭을 구분 짓는 연상과 이미지를 불러와 그들을 범주화 시킨다. 가까운 예로 한국 거주 조선족이 있다. 조선족은 실생활에서 그 자체가 멸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들을 안 좋게 부르는 몇 가지 언어가 더 있으나 함구한다. 지저분한 대림동 차이나타운, 인신매매, 살인청부, 비위생적인 마라탕 가게 등의 이미지를 씌운다. 조선족에 속한 이들의 개체성을 없애고 범주에 넣는다. 집단으로써 개인이 된다.
위 토대를 가능케 하는 요소가 있다. TV, 영화, 뉴스 등의 미디어, 출판물, 을을 갈라치며 이득 보는 기득권의 개입 가능성, 낮은 상상력(동일한 사람으로 연상하지 못 하는) 등이다. 쉬볼레트라 불리는 나와 상대를 나누는 모든 것이 우리 민족의 순수성을 올린다. 본원적 국가는 없다. 이미지로써의 국가가 세워지고 진짜 국민이란 개념이 생긴다. 평등엔 상한선이 생긴다. 가짜 국민의 평등 요구는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안 된다. 그 결과 '행복의 가능성'이 차등 배분된다.
발언 시간도 차등 배분됐다. 원치 않게 많은 말을 했다.
3. 사진 권태기
두어 달 전에 사진에 열중하고 있다 말했다. 하루가 멀게 사진집을 보고, 사진을 찍었다. 찍은 사진이 많아 관리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주식 시장엔 사이클이 있다. 잘 되고 안 되는 주기를 뜻한다. 사진 열정도 사이클이 있다. 지난 몇 년의 경험이 말해준다. 열정 고갈의 시기를 점쳤고, 아니나 다를까 그때가 찾아왔다.
열정은 사소한 이유로 불타오르고 식는다. 식은 이유는 단순하다. 겨울이라서. 날이 춥다. 이불 밖이 무섭다. 해가 빨리 진다. 다섯 시면 어둑어둑하다. 날이 흐리면 사진을 찍지 않는다. 사진은 빛의 예술인데, 예술 할 수 없다. 내가 못 하는 예술, 빛이라도 해야 한다. 둘 다 못 하면, 이미지에 예술이 없다.
사진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선, "신이시여 정녕 이 사진을 제가 찍었단 말입니까?"란 말을 유발하는 사진이 하루에 한두 번은 나와야 한다. 찍은 직후에 불필요하게 감탄하는 경향이 있다. 며칠 지나야 객관성을 찾는다. 행동경제학자 빙의해 이름 짓는다면 '내사진찍은직후편향'이라 할 수 있다. 무신론자가 신 타령할 정도 돼야 며칠 만족이 이어진다. 내 사진이 동기부여의 원천인데, 원천이 말랐다. 빛이 강하고, 활동하기 편해야 신이시여를 외친다. 마음에 드는 사진은 빛과 열정의 합이기 때문이다. 빛도 없고, 활동도 불편하니 마음에 드는 사진 찍을 확률이 낮아지고, 동기부여가 안 되니 덜 찍는다. 권태기가 자연스럽다. 봄 되면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