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내 시간은 빠르게 간다. 재밌는 것만 하고 살면 시간이 빨리 간다. 고정된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누군가 필요하면 나가서 도움 준다. 그 외엔 카페에 나와 커피 마시며 읽고 쓴다. 그러니까 놀고 먹는다. 한 마디로 백수다.
백수란 단어엔 고정관념이 있다. 사회적으로 무용한 존재, 게으른 존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돈으로 치환된다. 누군가 만들어내는 자본의 규모가 그의 인간됨을 나타낸다고 여긴다. 일반적으로 백수는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중요하지 않은, 그러니까 우스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미디어에 보이는 백수는 이렇다. 헝클어진 머리와 지저분한 수염을 하고 추리닝을 입은 사내. 엉덩이를 박박 긁으며 낮 시간 즈음 일어난다. 노모가 차려놓고 나간 아침을 먹는다. 컴퓨터를 켜서 온라인 게임을 하고 누워서 만화를 본다. 시청자들은 은근한 위안을 얻는다. 조소하며 말한다. "아이고 저 한심한 놈. 깔깔깔" 사회적인 인식 덕에 백수임을 천명할 수 없다. 직업부터 물어보는 사회에서 외부 활동이 소극적으로 변한다. 돈까지 없다 보니 어디에서 뭘 할 수도 없다. 사회의 인식과 부족한 경제력은 인간을 소극적으로 만든다.
나는 백수다. 그런데 생산수단이 있는. 경제력 덕에 매일이 여유롭다. 아침에 일어나 스도쿠 한 판 한다. 아파트 옥상 헬스장에서 유산소로 천국의 계단 하고, 머신으로 근력 운동 몇 개를 한다. 집에 와 프로틴 쉐이크 먹고, 샤워하고 집 정리하고 카페로 출근한다. 11불 하는 드립 커피를 시킨다. 꽃, 살구, 오렌지 껍질, 흑설탕 등을 블렌딩한 르완다 산 콩을 사용했다. 정성 들여 내린 커피의 향과 맛을 음미한다. 비커에 담긴 커피를 조금씩 에스프레소 잔에 덜어 목을 적신다. 랩톱을 편다. 유튜브 뮤직에서 맞춤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다. 음악을 들으며 그날 할 일을 정리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만날 사람을 찾는다. 카페에 친구가 놀러 오면 커피와 디저트를 사준다. 같이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나눈다. 이후에 만날 사람이 생기면 만나고, 아니면 귀가한다. 누군가를 만나면 함께 저녁을 먹는다. 분위기 좋은 바에서 생맥주와 와인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보통 내가 계산한다. 친구를 만나지 못 하면 귀가한다. 집에선 샐러드와 스테이크를 먹는다. 생산수단 덕에 위와 같은 소비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다.
요컨대 백수에게 생산 수단이 생기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는 생산 수단이 있다. 보유한 가게는 고정적으로 이익을 분배한다. 내 지분에 상응하는 수익이 통장에 꽂힌다. 일 안 하고 노는 건 똑같다. 생산수단이 백수란 단어 위로 '자본가'란 타이틀을 덧댄다. 생산수단의 존재를 알면, 누구도 나의 놀고먹음에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생산수단을 만들기 위해 노력과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능한 친구가 주위에 있었고, 그가 투자할 사람을 찾고 있었고, 마침 주식 투자로 만든 유동 자산이 있었다. 한 일이라곤 투자 결심 뿐이다. 그 이후론 온전히 친구의 능력이 만든 결과물이다. 한 번의 결정이 모든 풍요를 만든다. 지독하게 불공평한 세상이다. 똑같이 놀고먹는데 누구는 손가락질 받고 누구는 박수 받는다. 놀고먹는 인간의 본질은 다른 게 없음에도 말이다.
대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무엇일까? 생산수단의 유무에 극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물질적, 정서적 양면에서 말이다. 자본 없는 백수는 사회의 변두리에 머문다. 그들의 경제 활동 공백은 평가절하의 이유가 된다. 자본이 생기면 말은 달라진다. 생산 수단은 보유자를 사회적으로 필요한 인물로 만든다. 시간 구분 없는 소비로 부의 재분배에 기여한다. 그러나 놀고먹는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중 잣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허구를 그린다. 우연한 생산수단의 획득이 모든 사회적 평가와 대접을 응당 그래야 할 것으로 만든다. 이 사회는 생산 수단을 인간 판단의 절대 기준으로 활용한다. 세상은 운으로 흘러간다. 운 좋은 이들의 기득권을 보존하기 위한 논리체계를 만든다. 그것을 능력, 노력, 유전자 등의 포장지에 씌운다. 그렇기에 제도는 모두에게 최소한의 삶을 보장해야 한다.
나는 시간과 재화의 풍요에서 헤어 나오지 못 한다. 경제적 풍요의 주요 출처는 가게다.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관련 인물들이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일을 처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최대 수혜자 중 하나인 나는 별다른 역할이 없다. 그러니까 자본론에서 그리는 악덕 자본가의 표상이다. 과실만 따 먹는다. 비지니스 서적은 가르친다. 사장이 매장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 능력 있는 동업자와 책임감 있는 중간 관리자가 그 역할을 한다. 많은 가게가 사장의 직접 참여를 요구한다. 직접 참여 없이 순항하는 가게를 보유한 것은 운의 작용이다. 내 능력과 무관하다. 그 한순간의 운이 나의 삶을 이토록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사도 바울이 말했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나는 일 안 하고 잘 먹는다.
생각과 행동이 반대를 향한다. 머리는 이 삶이 부당하다 말하고 몸은 이 삶의 풍요를 만끽한다. 자신이 사회의 기생충처럼 느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 기생하는 기생충. 능력 없고 노력 안 하는 게으른 나다. 이런 사치를 감히 누려도 되는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격 운운하기 멋쩍은 부분이 있다. 원래 불평등한 사회이고 이 불평등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간 사민당의 출현과 기본소득을 주창했다.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길 바란다. 그런 사회를 꿈꾼다. 현실에서 나는 체리 피커다. 사회의 불평등에 기생해 놀고먹는 유한계급이다. 물론 이 구조가 언제든 깨질 수 있다. 그렇기에 평등한 사회를 말한다. 이 삶을 살면 경각심이 줄어든다. 이 여유와 풍요가 익숙해진다. 한 번 늘린 소비를 줄일 수 없다. 만약 자본가로서 위치가 공고해지면 그때도 나는 사민당과 기본소득을 외칠 수 있을까? 나의 부를 기꺼이 나누고자 할까? 나의 풍요를 포기할 수 있을까? 타락의 과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죄책감이 점점 저 먼 곳으로 가고 있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매일이다.
결국 이 글은 유한계급의 배부른 소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이 한 인간의 삶을 재단한다. 운 좋게 생산수단을 얻었다. 커피 마시러 가는 길에 되뇐다. '살맛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죄책감은 점점 옅어진다. 생산수단 가진 백수 삶에 적응한다. 문득 깨닫는다. 나의 사회적 발언은 기만이다. 오늘도 불평등을 논하며 내게 찾아온 운을 만끽한다.